창비 한국사상선 제25권 『나혜석·염상섭: 개성의 해방과 문명전환』은 근대 조선 예술사의 두 거장인 나혜석과 염상섭의 글과 말을 엮은 책이다. 각각 한국 서양화의 개척자와 한국 근대소설의 완결자로 평가받는 두 사람은 생전에는 여러 논란 속에서 그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사후에는 그나마 각각 ‘1세대 페미니스트’ ‘자연주의 소설가’라는 칭호를 얻었지만, 이 두 사람의 작품 전반을 총괄하지 못한 일면적 평가가 아쉬울 뿐이었다.
이 책의 엮은이 강경석은 나혜석과 염상섭의 글 중에서 그들의 사상적 변모를 엿볼 수 있는 글들을 따로 따로 추려냈다. 구한말 문명전환기에 태어나 신지식을 익히고 3·1운동을 거치며 ‘개성의 해방’을 위한 예술가로서 자각했던 나혜석과 염상섭을 이제 사상사적 맥락에서 재해석해야 할 때다.
나혜석(羅蕙錫, 1896~1948?)은 한국 근대사에서 가장 주목받는 여성 지식인 중 한 명으로, 화가이자 작가, 여성운동가, 독립운동가로서 복합적인 정체성을 지닌 인물이다. 그녀는 조선 말기와 일제강점기라는 격변의 시대를 살아가며 한국 여성으로서 최초로 여러 영역에서 선구적인 발자취를 남겼다. 전통적인 여성상에 대한 도전과 사회적 억압 속에서도 자아를 찾으려 했던 그녀의 삶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깊은 영감을 준다. 문필가로서 나혜석은 ‘신여성’ 담론의 중심에 서 있었다. 《조선일보》《동아일보》《여자계》《신여자》 등 각종 신문과 잡지에 여성의 권리와 해방을 주장하는 글을 기고하며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녀는 「이혼고백서」「부인문제와 결혼관」「여자도 사람이다」와 같은 저술을 통해 여성도 남성과 동등한 인격체임을 역설했다. 당시 그녀의 글은 보수적인 조선 사회에서 도전적이고 파격적인 발언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녀의 그림과 글은 일제강점기 조선 여성의 억압된 현실과 그 속에서의 저항을 생생하게 담고 있다. 나혜석은 끝까지 “여자도 사람이다.”라는 신념을 굽히지 않았고, 개인의 비극적인 삶에도 불구하고 여성 해방과 민족 해방의 가치를 위한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나혜석의 정확한 사망 시기와 장소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녀의 삶은 비극과 투쟁, 창조와 저항으로 점철되어 있다. 사후에도 오랫동안 역사 속에서 잊혀졌던 그녀는 1980년대 이후 한국 페미니즘의 부흥과 함께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오늘날 나혜석은 한국 근대 여성사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미술, 문학, 사회운동 등 다양한 영역에서 보여준 그녀의 활동은 당시 조선 사회에 큰 울림을 주었으며, 이후 한국 여성운동의 상징적인 인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그녀의 이름은 이제 ‘신여성’이라는 말과 함께 한국 근현대사를 대표하는 여성으로 기억되고 있다.
1897년 서울 종로구 필운동에서 태어난다. 중인 계층의 서울 토박이라는 계층적 특징은 염상섭 문학 세계의 근간을 이루는 것으로, 그의 소설에서는 풍부한 서울말의 흔적과 근대적 삶에 대한 예민한 현실 감각을 찾아볼 수 있다. 관립 사범 학교를 중퇴하고 보성학교 중학 과정을 수학하던 중 1912년 염상섭은 일본 유학을 떠난다. 일본군 육군 중위였던 맏형의 도움으로 교토(京都)부립 제2중학을 마치고 이후 게이오의숙대학(慶應義塾大學) 예과 1학기를 다니다 자퇴한다. 그러던 중 조선에서 발생한 3·1 운동의 소식을 듣게 되고, 이에 3월 19일 오사카 덴노지(天王寺) 공원에서 단독적으로 독립 선언을 주재했으나 거사 직전 검거된다. 약 3개월간의 수감 후에는 요코하마의 복음(福音)인쇄소에 취직해 직공 노릇을 한다. 이 시기 경험한 양가적 경험, 즉 ‘근대 그 자체로서의 일본(문학)에 대한 의식’과 ‘제국 일본과 식민지 조선의 문제’는 이후 염상섭 문학 전반을 관통하는 핵심적인 요소로 구체화된다.
1920년 1월 ≪동아일보≫ 기자로 임명된 염상섭은 귀국해서 정경부 기자로서 활동하다 1920년 7월 사직한다. 염상섭은 ≪폐허≫ 창간호 동인으로 활동하는 한편, 1920년 하반기부터 1921년 봄까지 오산학교에서 교직 생활에 몸담기도 한다.
1921년 <표본실의 청개구리>를 발표하며 문단에 데뷔하고 문단의 주목을 받는다. 1924년 ≪시대일보≫에 발표된 ≪만세전≫은 염상섭 문학의 전환점을 보여 주는 작품이다. 이러한 문학적 성취는 1926년에서 1928년 사이에 이뤄진 두 번째 일본 유학과 결부되어 보다 심화된 문제의식으로 나아간다. 일본 유학 중에도 염상섭은 꾸준히 작품을 발표하고 있으며 일본인과 조선인이라는 민족적 정체성의 문제(혈통, 혼혈)를 밀도 있게 다룬다.
1928년 2월 귀국해서 ≪이심≫, ≪광분≫ 등을 연재하는 것에 이어 마침내 1931년 ≪삼대≫를 발표한다. 1920∼1930년대 발표된 염상섭의 작품들은 식민지 근대의 문제를 탐구하며, 식민지 조선의 정치·경제·사회·문화·사상에 관한 사유를 전개하고 있다. 역사와 사회·현실을 객관적으로 들여다보며 이를 깊이 있는 문제의식으로 구체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리얼리즘적 성격을 나타낸다. ≪삼대≫ 이후 염상섭은 ≪백구≫, ≪모란꽃 필 때≫, ≪불연속선≫ 등의 장편 소설을 발표하지만, 이들 작품은 앞선 시기의 작품들에 비해 통속화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런 가운데 1930년대 중반 염상섭은 돌연 만주행을 선택한다. 진학문의 권유로 ≪만선일보≫의 편집국장으로 근무하며, 1939년 만주 안동 대동항 건설 사업 선전에 종사한다. 이 기간 중 염상섭은 장편 소설 ≪개동≫을 집필하고, 안수길·박영준 등의 창작집 ≪싹트는 대지≫와 안수길의 창작집 ≪북원(北原)≫ 등의 서문을 쓴 것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창작 활동을 보이지 않는다. 1945년 광복을 맞이하기까지 약 10여 년의 기간 동안 그는 일종의 ‘문학적 단절’의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해방된 서울로 돌아온 염상섭은 <해방의 아들>을 발표하며 다시금 문학 활동을 이어 가고, ≪경향신문≫ 창간 당시 편집국장으로 근무하기도 한다. 해방의 감격과 함께 곧이어 마주하게 된 ‘해방 이후’ 식민지의 모순, 미소 분할과 신탁 통치, 남북 분단 등의 혼란한 사회 현실의 모습을 <엉덩이에 남은 발자국>, <삼팔선>, ≪효풍≫ 등의 작품을 통해 세밀하게 그려 낸다.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하지만 염상섭은 피난을 떠나지 못한다. 9·28 서울 수복, 10·25 중공군 개입, 1951년 1·4 후퇴의 혼란 속에서, 염상섭은 윤백남, 이무영 등과 함께 해군에 입대해 1951년부터 1953년까지 부산과 서울 정훈감실에서 해군 소령으로 복무한 뒤, 1954년 5월 임시 중령으로 전역한다. 전쟁의 발발과 폐허가 된 전후(戰後)의 현실 등과 같은 역사적 비극 앞에서, 염상섭의 소설은 일상적 삶의 감각을 객관적으로 보여준다. 1950년대 중후반 이후 발표되는 일련의 후기 작품들은 주로 남녀 연애담에 기반한 결혼과 가족의 문제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염상섭은 1963년 3월 14일 서울 성북동에서 타계한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서울 토박이의 삶은 서울에서 마무리된다. ‘작가’ 염상섭이 남긴 빛나는 작품들은 여전히 여기에 남아 있다. 염상섭은 평생에 걸쳐 작품 창작에 임하고, 소설을 쓴다는 것의 의미를 붙들었던 작가였다. 그가 보여 주는 치열한 소설 쓰기의 모습은 시대를 헤쳐 나가는 염상섭이라는 한 개인의 역사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거대한 물줄기로서 정립되어 가는 한국 문학사 그 자체의 역사와 다름없다.